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그냥 아무 말이나

1. 정리만 하다 하루가 간다.

by podami 2019. 3. 20.

정작 이곳을 떠나는 건 Y박사 언니인데, 내가 더 요란하게 짐 정리를 하고 대 청소를 하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다. 세 번째로 언니에게 물건을 오늘 받으러 가니 아직 정리가 덜 끝난 언니의 방은 오히려 평온(?) 해 보였다. 



이번 주 내내 몸살이 걸릴 듯이 집을 치우고 분류하고 해체하고 박스에 라벨링을 하고 어디에 놓을지 보았다가, 다시 배치하길 반복했다.



문득 좀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. 시험 끝나고 여러 가지 공부 계획을 세웠는데 거의 온종일 청소와 정리에만 집착하고 이 좁은 공간에서 뭘 그렇게 효율적인 공간 배치를 하겠다고 며칠씩을 버렸는지..



물건 없이 살다가 갑자기 몇 박스에 달하는 새로운 물건들이 생기니 혼란스러웠다.



생리를 하는 데다가 온종일 쓸고 닦고 정리하는데 힘을 쓰고 나니 탈진했다. 문득 스스로가 좀 우스웠다.  고작 이런 방에 살면서 무얼 그리 바꿔보겠다고 종종 거렸을까.



어렸을 적부터 왜 이렇게 공간에 집착하는지 모르겠다. 일종의 강박이다.



Y 언니에게 TV도 선물 받았지만 결국 나는 그 큰 티브이를 감당할 수 없어서 다시 박스 포장을 해서 넣어두었다. 컵이 단 하나였다가 지금은 컵이 9개가 되니까 이 컵들을 어찌할 바를 몰랐다. 양념도 소금 설탕 간장 참기름만 있다가 언니가 다양한 양념을 주셨고, (물론 엄청 감사하다) 나는 이것들을 정리하느라고 또 몇 시간을 보냈다. 



나란 인간의 사이즈가 이렇게 작은가 보다. 통이 작다. Y언니는 수요일에 짐을 빼는데도 매우 호탕하게 웃으면서 사람들을 불러서 또 대접을 해줬다. 적당히 어지러운 상태에서도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듯했다. 



짐 정리를 하다 보니 밤 11시가 넘어갔다. 해야 할 공부는? 지금 얼마나 독일어 공부가 지체되고 있는지 알면서도 쓸데없는 것들에 시간을 쓰고 회피하는 내가 너무 싫은 하루였다.



회피의 방식은 다양한데, 나는 강박증 환자처럼 계속 정리를 한다. 정리되어있는 것들 다시 다 해체해서 다시 분류하고 다시 카테고리를 만든다. 가장 중요한 일부터 먼저 해야 하는데 정리가 안 되어 있으면 아예 뭘 시작을 못한다. 이게 전형적으로 공부하기 못하는 사람들의 특성이라는데... 요리를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버겁기만 하다.



한국에 살 때는 항상 내 공간과 책상은 깨끗했고, 밥을 먹는 공간은 분리되어있었으므로 (식당) 머리 아플 게 없었다. 그런데 이것은 공부하는 공간과 밥 먹는 공간 요리하는 공간이 일치하니 돌아버릴 것 같다. 밥하고 요리하고 먹고 치우고 또 어질러지면 청소해야 하고 그러니까 정작 중요한 공부가 밀린다. 



이런 내가 너무 짜증스럽고 싫은 날이다. 성격을 바꿔보고 싶지만 안된다.



아이를 낳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이유 중의 하나도 애가 어지르는 게 너무 싫을 것 같다. 공간의 통제성을 잃으면 나는 많이 불안해진다. 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정리하는데 집착하는 내가 한심하고 싫다.




보통은 정리를 하면 뿌듯함이 드는데, 오늘은 기분이 좋지 않았다. 스스로가 하찮게 느껴지고 한심하게 느껴지는 하루였다. 
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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